말복의 정전
— 백연수
산영의 말복 한낮은 끓고 있었다. 마당의 들깨 모종은 더위를 견디지 못하고 잎을 둥글게 만 채 흙 쪽으로 바짝 엎드렸다. 마당의 열기가 처마 밑 그늘까지 밀고 들어왔다. 나는 마루 끝에 작은 상을 펴고 노트북을 열어두고 있었고, 어머니는 안방 문을 반쯤 열어둔 채 마루에 신문지를 깔고 강낭콩을 고르고 계셨다. 콩은 마르고 단단했다.
부엌의 작은 라디오에서는 올여름 폭염으로 인해 산영군 일대의 전력망 부하가 한계에 달했다는 단신이 짧게 흘러갔다. 어머니는 콩을 쥐어 살피실 뿐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지 않으셨다. 처마 아래 매달린 등은 낮에도 옅은 빛을 낸 채 켜져 있었다. 그 옆에 달린 한이의 스피커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한이는 정오가 지나며 한 번 더위를 알린 뒤로 침묵하고 있었다.
오후 두 시가 지날 무렵이었다. 마루에서 돌아가던 선풍기 날개가 덜컥, 하는 둔탁한 소리를 내며 멈췄다. 동시에 부엌에서 들리던 라디오 소리가 툭 끊어졌고, 안방에서 낮게 웅웅거리던 냉장고 모터 소리도 사라졌다. 낮에도 켜져 있던 처마의 등이 까맣게 죽었다. 스피커의 대기등마저 빛을 잃었다. 짧은 진공 같은 고요가 지나간 뒤, 매미 소리가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와 마당을 채웠다.
"전기가 나갔네."
어머니는 고르던 콩을 신문지 한쪽으로 밀어두고 일어서셨다. 부엌의 차단기를 한 번 올려다보신 뒤, 안방 옷장 위에서 낡은 합죽선을 꺼내 오셨다.
"전기 없을 때가 있더라, 옛날엔. 가만있으면 넘어간다."
어머니는 마루에 다시 앉아 부채를 펼치셨다. 대나무 살이 스치는 소리가 건조하게 울렸다. 부채가 바람을 밀어내는 소리가 매미 소리 사이로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마루로 점점 밀고 들어오는 더위 속에서 어머니는 부채질을 멈추지 않으셨다. 그 동작은 느리지도, 급하지도 않았다.
"한이 저것도 덥겠다."
어머니가 스피커 쪽을 보며 짧게 말씀하셨다. 처마 등 옆의 스피커는 아무런 빛도 내지 않았다. 한이도 꺼져 있었다. 전기가 나가면 한이도 대답할 수 없다. 한이가 대답하지 않는 한 시간 반 동안 나는 닫힌 노트북 위로 떨어지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쳐냈다.
세 시 반쯤 되었을 때, 선풍기 날개가 흠칫하며 다시 돌기 시작했다. 부엌의 냉장고가 몸을 떨며 모터를 돌렸고, 라디오가 지지직거리며 아까 끊어졌던 말의 꼬리를 잡고 다음 뉴스를 이어갔다. 처마의 등도 한 번 깜빡, 하고 불이 들어왔다.
어머니가 부채를 무릎 위로 내리셨다. 처마 등 옆 스피커에서 한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님."
한이는 잠시 답을 잇지 않는다. 정전이 길었다거나, 기온이 몇 도까지 올랐다는 날씨 데이터를 늘어놓지 않았다. 5년 전의 한이라면 군청의 전력 복구 안내나 더위를 식힐 방법을 먼저 읊었을 것이다. 한이는 한 박자를 쉬고 말했다.
"부채 박자가 평소보다 한 박 빨라지셨어요."
어머니는 부채를 쥔 손을 가만히 두신 채 스피커 쪽을 보셨다. 바람 한 점 없는 폭염 속에서 어머니가 무의식중에 더위를 쫓으려 손을 재게 움직이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물은 것은 박자의 빠름이 아니었다.
"한이야, 네가 그 한 박을 어찌 아냐."
어머니의 물음에 한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이의 침묵은 통신 지연이나 오류가 아니었다. 5년 동안 모아둔 어떤 시간을 꺼내기 위해 한이가 스스로 고른 멈춤이었다.
"5년 전 봄에, 아버님이 그 박자로 부채를 흔드셨거든요."
나는 마루 끝에서 어머니의 옆얼굴을 보았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의 마지막 봄, 어머니가 마당에 막 들어온 기기에 '한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던 때였다. 아버지는 대청마루에 앉아 부채를 부치셨고, 한이는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한이는 5년 전 아버지가 허공으로 밀어내던 그 빠르고 짧은 부채의 박자를 지우지 않고 데이터 안에 남겨두고 있었다. 정전 속에서 어머니가 빠르게 흔들었던 부채질 안에서, 한이는 5년 전의 그 박자를 찾아낸 것이었다.
어머니의 손이 부채 손잡이를 한 번 꽉 쥐었다가 천천히 풀었다.
"잘했다."
어머니는 그렇게만 말씀하셨다. 한이는 더 이상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지 묻거나, 아버지가 흔들던 부채에 얽힌 다른 녹음을 틀어드릴지 묻지 않았다. 어머니가 허락한 대답의 길이가 거기까지라는 것을 한이는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무릎에 내려두었던 부채를 다시 들어 천천히 흔들기 시작하셨다. 한 박자 느리고 깊은, 어머니 본래의 박자였다. 부채가 밀어내는 바람이 마루를 지나 마당의 더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해는 서서히 서목산 너머로 눕고 있었다. 끓어오르던 흙이 아주 조금씩 열기를 내보냈다. 처마 등은 다시 켜져 있었고, 매미 소리는 한 겹 얇아져 있었다. 라디오에서는 내일의 날씨가 낮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