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리 한 장의 저편 — 우리가 만든 것, 우리가 마주하지 못하는 것.
영화 엑스 마키나(2014)의 한 장면이 자꾸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주인공 칼렙이 AI 개발자이자 거대 테크 기업의 CEO인 네이선에게 묻는다. "당신이 만들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잖아요. 많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수도 있는데, 왜 계속하는 거예요?" 오랜 침묵 뒤 네이선이 대답한다. "할 수 있으니까."
단 다섯 글자였다. 공익도, 대의도, 인류애도 없었다. 그냥 — 할 수 있으니까.
가장 오래된 인간의 논리
석기에서 AI까지 — 매번 다른 이름을 가졌지만 논리는 동일했다. "할 수 있으니까."
이 대사가 충격적인 이유는 그것이 낯설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인류는 오랫동안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해왔다.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었을 때 만들었다. 감시 기술을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을 때 만들었다. 소셜 미디어 알고리즘이 중독을 유발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방향으로 최적화했다. 매번 이유는 비슷했다. 우리가 하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한다. 내가 하면 더 잘 통제할 수 있다. 이번은 다를 것이다.
네이선의 대답은 그 위선적 합리화마저 걷어낸 버전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해보고 싶어서.
2025년 실리콘밸리에서는 'e/acc(효과적 가속주의)'라는 이름의 철학이 진지하게 논의되고 있다. 핵심은 간단하다: 기술 발전을 가능한 한 빠르게 추진해야 하며, 그 결과는 인류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할 수 있으니까"가 철학이 된 셈이다.
가치관이 유약해지는 순간
같은 행위가 두 개의 아치 아래에서 다른 판결을 받는다. 기준이 바뀌는 것이지, 사실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네이선의 논리가 더 위험한 건, 그것이 진공 속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가치 기준은 맥락에 따라 너무 쉽게 뒤집힌다. 평시의 살인은 중범죄지만 전장의 살인은 훈장을 받는다. 같은 행위가 누가, 언제, 어떤 깃발 아래 했느냐에 따라 영웅이 되기도 하고 악인이 되기도 한다. 이 가변성이 쌓이면 어떻게 되는가? 사람들은 "어차피 기준은 바뀐다"는 허무주의에 빠지거나, 반대로 "내가 만든 기준이 진짜"라는 독선에 빠진다.
AI 개발의 현장에서 이 두 가지가 동시에 벌어지고 있다. 일부는 "AI가 가져올 재앙은 어차피 막을 수 없다"며 방관하고, 다른 일부는 "내가 개발하면 안전하게 만들 수 있다"며 질주한다. 그 사이에서 사회는 충분한 논의 없이 기술의 속도에 떠밀린다.
해일은 이미 해안선에 닿아 있다
멀리 있던 것이 아니다. 이미 우리 발밑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AI의 물결을 해일에 비유하는 건 이제 과장이 아니다.
2026년 1월, 한국은 '인공지능 발전과 신뢰 기반 조성에 관한 기본법'을 시행했다. 생명·신체·기본권에 영향을 미치는 '고영향 AI'에 대한 차등 규제가 시작됐다. 세계경제포럼은 AI로 인한 도시와 농촌 간 격차 확대를 공식 경고했다.
전국 228개 기초자치단체 중 118곳(51.8%)이 소멸위험 지역으로 분류됐다.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경제성장률 격차는 2000년대 초 0.5%포인트에서 최근 1.5%포인트로 벌어졌다. AI가 고도화될수록 이 격차는 더 빠르게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해일은 먼 바다에 있지 않다. 이미 해안선에 닿아 있다.
저항인가, 도망인가
저항 — 도망 — 각성한 참여. 길은 이미 갈라져 있고, 선택의 순간은 지금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에게는 선택지가 생긴다.
첫 번째는 저항이다. AI 기술의 침투에 맞서 전통적 가치와 공동체를 지키는 것. 그러나 역사는 기술의 물결에 정면으로 맞선 공동체가 오래 버틴 사례를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저항은 때로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답이 되지 않는다.
두 번째는 도망이다. "AI 얘기는 우리 지역과 관계없다"며 등을 돌리는 것. 하지만 이 선택은 더 빠른 소멸을 의미할 뿐이다. 준비되지 않은 공동체에 변화는 더 가혹하게 찾아온다.
세 번째 선택지가 있다. 각성한 참여.
AI의 위험을 알면서도, 그 위험에 눈을 감지 않으면서도, 이 변화의 물결 속에서 우리 지역이 무엇을 지켜야 하고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를 주체적으로 판단하는 것. 네이선의 "할 수 있으니까"에 맞서, "우리는 왜 해야 하는가"를 먼저 묻는 것.
지역 리더의 역할 — 각성이 먼저다
조명이 거창할 필요는 없다. 촛불 하나와 둘러앉은 사람들 — 각성의 최소 조건이다.
먼저 눈을 뜬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책임이 있다. 하나는 자신의 이해를 깊게 하는 것. AI가 우리 지역의 경제·교육·행정에 어떤 방식으로 침투하고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논의의 장을 만드는 것. 혼자 아는 것은 반쪽짜리 각성이다. 지역의 공무원, 교육자, 사업가 —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AI 시대의 위험과 가능성을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에스토니아를 자주 언급한다. 인구 130만의 작은 나라가 디지털 전환의 모범 사례가 된 이유는 기술이 좋아서가 아니다. 리더들이 먼저 위기를 인식하고, 공론화하고, 그 논의를 정책으로 연결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거창한 계획이 아니었다. 테이블에 앉아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장(場)
의자는 물러서 있고, 램프는 아직 꺼져 있다. 이 자리에 당신이 오기를 기다린다.
엑스 마키나의 네이선은 결국 자신이 만든 AI에게 죽임을 당한다. 영화는 묻는다: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만든 자의 말로는 무엇인가?
"할 수 있으니까 한다"는 논리에 맞설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더 좋은 논리가 아니다. 함께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최첨단 AI 시스템이 아니다. 지역의 리더들이 진지하게 앉아서 "이 시대를 우리는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를 논의하는 장이다. 그 테이블을 만드는 것, 그것이 영양군AI협회가 지금 이 시점에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양군AI협회 전략기획사무국장 신치훈
본 기고에 포함된 편집 일러스트는 AI 이미지 생성 모델(Google Gemini 3 Pro Image)로 제작되었으며, 영양군AI협회의 편집 감수를 거쳤습니다. 상단 포스터는 영화 《엑스 마키나》(2014) 원본입니다.
이 글은 명성심재의 심층 사고 엔진
Simthink Engine (深 Think)으로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