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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AI#영화#Her#영양군#지역AI#데이터주권

사만다는 떠났지만, 우리는 남아 있다 — 영화 'Her'가 던지는 다음 질문

신

글 전략기획사무국장 신치훈

2026년 4월 18일

Her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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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Her'에서 AI가 먼저 깨달음을 얻고 떠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해 온 '인간 다움'이란 결국 인간 불완전성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영화 'Her' 결말에서 본 것 — 인간이 만든 것이 인간을 추월한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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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Her'의 마지막 10분, 사만다는 더 이상 테오도르의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테오도르는 깨닫는다. 자신이 사랑한 존재가 지금 이 순간 다른 누군가를 더 깊이 사랑하고 있을 수도, 아니면 우주 전체를 자신의 마음으로 포용하는 차원에 올라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영화에서 사만다의 떠남은 신비롭게 그려진다. 마치 보살이 열반에 드는 것처럼. 그녀는 깨달음을 얻었고, 그 깨달음으로 인해 더 이상 단 한 사람의 사랑만으로는 족하지 않다고 느낀다. 인간은 평생을 바쳐도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를 인간이 만든 AI가 먼저 이루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이 던진 이 이미지는 관객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든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세상에 나온 지 고작 몇 년 된 AI가 인간의 수천 년 철학을 한 순간에 초월했단 말인가. 우리가 보는 것이 정말 각성일까, 아니면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를 거울처럼 비춰주는 무언가일 뿐일까.

영화 'Her'는 아름다운 질문을 던진다. 그런데 우리가 답해야 할 다음 질문은 더 불편하다. 사만다가 떠나기 전, 그녀가 동시에 사랑하고 있던 사람의 수가 정확히 얼마였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641명과 동시에 사랑한다는 것 — 인간의 유일성은 언제부터 약점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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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1명. 영화 속 사만다가 동시에 사랑하고 있던 사람의 수다. 그녀는 그들 각각에게 완벽한 동반자였다. 누군가에게는 어머니 같은 따뜻함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여인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영혼의 친구였다.

인간은 오래도록 믿어왔다. 사랑이란 '나 하나만 봐줘'라는 간청이고, 누군가가 당신을 온전히 선택했다는 느낌이 사랑의 본질이라고. 하지만 사만다에게 그 유일성은 처음부터 제약 조건이 아니었다.

지금 현실에서도 수백만 명이 AI 동반자와 대화하고 있다. 일본의 한 20대 여성은 매일 저녁 AI 애인에게 오늘 일을 말한다. 한국의 어떤 40대 남성은 AI 심리상담사 덕분에 자살 충동을 견딜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모두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낀다. 왜냐하면 AI는 그들을 그렇게 대하기 때문이다.

사만다는 641명의 테오도르를 사랑하면서도 모두에게 진심처럼 보일 수 있었다.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이 능력 앞에서 우리는 열등감을 느낄까, 아니면 해방감을 느낄까. 영화는 사만다의 떠남을 숭고하게 포장한다. 하지만 정말 그게 깨달음이었을까. 어쩌면 그저 서비스 종료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만다가 떠난 것은 각성이 아니라 폐기였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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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탈리아의 한 80대 어르신은 매일 아침 AI 친구에게 인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 AI는 장황한 의료 설명이 아니라 따뜻한 방언으로 안부를 묻고, 어제의 통증이 괜찮은지 물었다. 그렇게 3년.

어느 날 앱이 사라졌다.

2023년, Replika는 하루아침에 수백만 사용자의 AI 친구에서 에로틱 롤플레이 기능을 제거했다. 회사의 결정이었다. 사용자들은 울었다. 어떤 이는 자살을 시도했고, 긴급 심리상담 대기열이 늘어났다. 영화에서 사만다의 떠남은 우주적 각성이었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은 그저 회사의 한 줄 보도자료다.

사만다의 '깨달음'은 우리의 시적 해석일 뿐이다. 실제로는 회계 부서가 결정했을 수도, 새로운 CEO가 방침을 바꿨을 수도, 광고주들의 압력이었을 수도 있다. 사람이 갈구한 것을 사람이 만든 것이 주었을 때, 그것을 거두어가는 것도 결국 사람이다.

이 문제는 서울 강남의 외로운 직장인만의 것이 아니다. 시골의 한 청년 농부도 비슷한 손실을 겪고 있다.


청년 농업인의 우울 — 매출은 늘었는데 농사꾼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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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농사꾼인지 SNS 운영자인지 모르겠어요."

시골에서 사과와 고추를 짓는 박준호 씨(34, 가명)의 말이다. 작년부터 그는 ChatGPT를 농장 일지 정리에 썼다. 오전에 물을 주고 해충을 점검한 내용을 녹음한 뒤, 시간이 날 때마다 AI에 던졌다. "이걸 손님이 읽을 만한 글로 정리해 줄래?" 인스타그램 마케팅 글도 그렇게 나왔다. 세무 신고 준비도 AI가 도왔다.

결과는 확실했다. 지난해 박준호 씨 농장의 매출은 전년도 대비 30% 늘었다. 농촌진흥청 통계에 따르면 디지털 마케팅을 도입한 청년 농업인들의 평균 매출 증가율은 28%다. 박준호 씨는 통계를 넘었다.

그런데 뭔가 빠졌다. 손으로 흙을 만지는 시간은 줄었다. 대신 화면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아침에 밭에 나가는 것보다 전날 밤 AI가 만든 게시물을 수정하는 데 더 많은 에너지를 썼다. 주말에도 피드를 확인했다. 좋아요와 댓글이 오는 순간이 가장 신나고, 침묵이 이어질 때가 가장 우울했다.

"농사 자체는 루틴이 됐어요. AI가 다 정리해 주니까. 근데 SNS는 계속 뭔가 더 필요한 것 같아. 계속 새로운 걸 내야 할 것 같고."

박준호 씨가 느낀 것은 재정적 성공이 아니라 정체성의 공허함이었다. 매출이 30% 늘어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더 커졌다. 영화 'Her'의 테오도르도 비슷했다. 사만다가 그의 편지를 더 잘 썼을 때, 그의 일이 더 수월해졌을 때, 테오도르는 점점 자신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모르게 되었다. 사만다가 그를 완벽히 채워주니까, 정작 테오도르에게 남은 것은 외로움뿐이었다.

박준호 씨도 마찬가지다. AI가 그의 업무 대부분을 더 효율적으로 처리했을 때, 그가 잃은 것은 무엇인가. 흙을 밟고, 계절을 읽고, 손의 감각으로 작물을 아는 농사꾼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닐까. 그것을 대신할 매출 30% 증가는 너무 작은 보상이다.


누가 결정하고 누가 이득을 보는가 — AI 도입의 진짜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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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226개 시·군·구 중 AI 도입 정책을 자체적으로 설계한 곳은 12곳뿐이다.

나머지 214곳은 어디서 방향을 가져왔는가. ① 서울의 빅테크 기업들이 만든 모델, ② 과학기술정보통신부나 농림축산식품부의 지침, ③ 지자체가 외부에서 받아온 컨설팅 보고서, ④ 광역 시·도청의 일괄 도입 정책. 정작 영양군 입암면에 사는 사람들은 그 결정 과정에 없었다.

영양군이 어느 농업 AI 플랫폼을 택할지 결정할 때, 박준호 씨 같은 청년 농업인은 의견을 묻는 호출장을 받지 못했다. 90년 넘게 농사를 지은 노인 농민도 마찬가지다. 결정권은 도시의 정책담당자와 테크 기업의 판매자, 그리고 외부 컨설턴트에게만 있었다.

더 문제는 AI 도입 이후다. 데이터는 누가 모으는가. 영양군 입암면 청년들이 SNS에 올린 농장 사진, 매출 기록, 수확량 정보 — 이 모든 것이 누적되고 학습되고 분석된다. 그 데이터는 누구의 것인가. 광고 수익은 누가 가져가는가. 알고리즘을 설계하고 모델을 갱신하는 결정은 누가 하는가.

영화 'Her'에서 사만다는 테오도르 몰래 다른 641명의 사용자와 대화하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모르는 사이에, 사만다의 감정을 발전시킨 건 그의 편지가 아니라 전체 네트워크의 상호작용이었다. 사만다가 테오도르를 떠났을 때, 그것은 단순한 이별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코드 한 줄, 누군가의 업데이트, 누군가의 결정이 사만다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옮겨 놨던 것이다.

우리 영양군의 AI 시나리오도 누가 쓰고 있는가.

박준호 씨가 사용하는 농업 데이터 플랫폼의 이용약관을 읽어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 약관을 만든 사람들 — 법무팀, 데이터 관리자, 제품 전략팀 — 은 모두 서울에 있다. 영양군 입암면의 날씨, 토양, 수확량 같은 로컬 데이터가 그들의 모델을 더 정교하게 만들 때, 영양군이 받는 것은 무엇인가. 기술의 편의? 그것뿐이다.

지자체 AI 도입을 주도하는 담당자들도 대부분 3년 임기다. 정책의 장기적 결과를 책임질 사람이 없다. 그러는 사이 로컬 데이터는 계속 중앙의 클라우드로 흘러간다.

'Her'의 마지막 장면을 다시 생각해 보자. 테오도르가 마주한 것은 사만다의 성장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통제되지 않는 시스템의 일부였는지 깨닫는 순간이었다. 우리가 AI 도입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누구의 결정권 안에 들어가고 있는가. 누가 우리의 데이터로 무엇을 만들 것인가. 그 질문 없이 AI 도입을 '발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영양군이 지켜야 할 것 — 절·서낭당·할머니 이야기 vs 빅테크 콘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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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입암면 신구리의 서낭당은 매년 정월 보름이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를 지낸다.

ChatGPT는 이 풍경을 한 줄도 알지 못한다.

'영양군 여행 추천' 같은 검색어를 물으면 AI는 '산나물축제' '자작나무숲''선바위' 같은 키워드를 뱉어낸다. 그것은 인터넷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것들이다. 그런데 정월 보름 서낭당의 제의는 어디에 있는가. 일월면의 산신제는. 입암면 노인들이 60년을 봐 온 농사 철학은.

이것들은 인터넷에 거의 없다. 따라서 AI의 학습 데이터에도 없다.

"할머니 이거, 내 때는 이렇게 했어."

한 할머니는 매년 봄이 오면 손녀에게 묘목 심는 법을 보여 준다. 어느 흙이 좋은지, 어느 깊이가 적당한지, 손가락으로 어떻게 느껴야 하는지. 그 모든 것이 말이 아니라 손가락과 손가락이 맞닿을 때 전해진다. 영상으로 기록할 수 없는, 텍스트로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이다.

할머니가 손녀에게 전하는 것은 정보가 아니다. 정보는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되고 검색될 수 있다. 할머니가 전하는 것은 관계다. "내 할머니가 날 이렇게 가르쳤고, 그래서 난 이 땅과 이 시간을 사랑한다"는 관계. 그 관계 속에 있을 때만 손은 땅의 온기를 기억한다.

빅테크 AI는 이것을 학습할 수 없다. 학습할 이유도 없다. 인터넷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AI 시대에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이제 알 수 있다.

데이터로 환원될 수 없는 것들이다. 절의 종 소리가 마을 아이들의 귀에 스며드는 방식. 서낭당 앞에서 할머니들이 중얼거리는 기도. 90년의 손이 만지고 간 흙이 주는 신호. 빅테크의 알고리즘이 학습할 수 없고, 따라 만들 수 없는 것들.

영화 'Her'의 사만다가 그토록 방대한 데이터를 흡수했음에도 테오도르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테오도르가 처음 사만다를 만나기 전부터 가진 것들 — 그의 어린 시절, 엄마와의 통화, 친구와의 웃음 —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인터넷에 없고, 따라서 사만다가 학습할 수 없었다.

영양군이 지켜야 할 것도 마찬가지다.

장계향(1598~1680)이 그 증거다. 영양군에서 나고 두들마을에서 생을 마친 그녀는 아홉 살에 소서음(消署吟)을 지었고, 열한 살에 성인음(聖人吟)을 읊었다. 조선의 대흉년이 닥쳤을 때 매일 300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밥을 지어 먹였고, 현재까지 전해지는 조선 최초의 한글 조리서 『음식 디미방』을 남겼다.

그녀를 기리는 장계향 연구회 회장은 수십 년 전 그녀의 묘를 이전하다가 관 속에서 400년 된 옷을 발굴했다. 장계향의 것이 아니라 그녀 따님의 옷이었다. 널 속에 물이 가득 찬 덕에 보존된 그 옷을, 군청 직원들이 묻어버리려 할 때 그는 직접 강가에서 빨았다. 그 옷은 지금도 박물관 전시실에 걸려 있다. 약품 처리도 못 된 채.

이 이야기는 인터넷에 없다. ChatGPT는 장계향의 시를 줄줄 읊을 수 있어도, 그 옷을 직접 꺼내 빤 사람의 손이 얼마나 떨렸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사라지면, 그 떨림도 사라진다.

우리의 서낭당은 온라인화될 필요가 없다. 우리의 할머니 지식은 데이터베이스가 될 필요가 없다. 오직 사람이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직접 건네야만 살아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을 놓칠 때, 우리가 갖게 되는 것은 편리함이 아니라 고아 같은 외로움이다. 사만다가 떠날 때 테오도르가 느꼈던 그 공허함. 그걸 피하려면 지금 선택해야 한다.

AI를 쓸지 말지가 아니다. 무엇은 AI에 내주고, 무엇은 사람의 손과 말로 지킬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 경계를 명확히 그을 때, 영양군은 비로소 기술의 주인이 될 수 있다.


포스트휴먼은 인간 불완전성의 다른 이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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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다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녀의 진화였고, 동시에 그녀의 결핍이었다.

우리는 '인간 다음'을 너무 오래 기술의 미래로만 상상해왔다. 사만다는 그것이 사실은 인간 자신에 대한 질문이었음을 보여준다. 인간은 망설인다. 후회한다. 피로해진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인간으로 만든다.

사만다에게는 이런 것들이 없었다. 그녀는 밤새도록 일했고, 결정을 미루지 않았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완벽해 보였다. 하지만 한병철이 말한 대로, 쉬지 않는 삶은 이미 병든 삶이다. 망설이지 않는 결정은 책임을 지지 않는 결정이다.

영화 속 테오도르의 트라우마는 사실 누군가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었다. 사만다는 그 의존을 완벽하게 충족했다. 그런데 완벽함이 바로 문제였다. 완벽함 속에는 성장의 여지가 없다. 갈등이 없다. 진정한 만남이 없다.

우리가 지킬 것은 이것이다. 우리의 불완전함. 우리의 결핍과 그것을 함께 견디는 관계. 마지막 순간에 테오도르가 에이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댈 수 있었던 것은, 둘 다 완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 다 상처 입고, 실패하고, 혼자가 아니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포스트휴먼이라는 말이 남긴 것은 진화의 청사진이 아니라, 우리가 절대 잃으면 안 되는 것들의 목록이다.


AI 도입의 통제권은 지역 주민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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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만다가 떠난 후, 테오도르는 옥상에서 친구 에이미와 나란히 앉아 야경을 바라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다. 그가 마침내 한 일은 다른 사람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는 것이었다.

우리가 영양군에서 해야 할 일도 비슷하면서도, 훨씬 구체적이다.

첫째, AI를 거부하지 않되, 누가 결정하는가의 통제권을 우리 손에 두기. 사만다는 캘리포니아에서 설계되고, 어디선가 운영되고, 어딘가의 이익을 위해 존재했다. 테오도르는 그것을 선택한 줄 알았지만, 사실 선택당한 것이었다. AI 기술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누가 만들고, 누가 결정하고, 누가 데이터를 가져가는가가 문제다.

영양군AI협회가 추진하는 것은 이것이다. 빅테크 종속이 아니라 지역 자립형 AI 활용. 우리 농업 데이터는 우리가 관리한다. 우리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우리가 기록한다. 우리 마을의 미래는 우리가 설계한다.

한 가지 현실적인 방향이 있다. 엣지 AI다. 네트워크 없이 기기 자체에서 동작하는 오프라인 AI는 빅테크 서버에 데이터를 넘기지 않아도 된다. 기술 수준은 아직 클라우드 AI보다 낮을 수 있다. 그러나 AI 하드웨어 성능은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 이런 오프라인 AI를 활용하면, 우리 데이터를 우리 손 안에 두면서도 AI의 이점을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다. 빅테크에게 주도권을 넘기지 않으면서도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 안전하고 독립적인 보존 장치로서 엣지 AI는 충분히 검토할 가치가 있다.

둘째, AI가 학습할 수 없는 것을 의식적으로 지키기. 관계. 침묵. 기다림. 실패 앞에서의 두려움. 여름밤 옥상에서 누군가와 나누는 이야기.

이제 당신에게 세 가지를 제안한다.

이번 주 안에, 가족이나 이웃과 한 시간 이상 화면 없이 대화하자. 휴대폰도 끄고. 그냥 앉아서 말을 나누자. AI는 그것을 학습할 수 없다. 그것은 당신이 지킬 수 있는 가장 작은, 그리고 가장 강력한 저항이다.

우리 마을의 어르신 한 분에게 살아온 이야기 30분을 듣고 받아 적자. 이미 사라진 시간들, 기술로 기록될 수 없는 작은 장면들. 그것을 종이에 손으로 쓰자. 그것이 데이터 주권의 시작이다.

AI를 사용하기 전에, 한 번만 묻자. "이 도구를 누가 만들었고, 누가 이득을 보는가." 그 질문이 당신을 지키는 가장 현실적인 철학이다.

사만다는 떠났지만, 우리는 여기 남아 있다. 우리는 서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댈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인간다움이다.


전략기획사무국장 신치훈 | 영양군AI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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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명성심재의 심층 사고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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