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자리 — NCS는 한국이 무의식 중에 만든 자동화 청사진이다
2026-04-29 · 전략기획사무국장 신치훈
한국이 20년에 걸쳐 만든 직무 명세는 그 자체로 인공지능 작업 명세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표준화의 정점이 자동화의 입력이 되는 역설.
어제 인적자원개발(HRD) 분야의 한 교육에 다녀왔다. 강의실은 정돈돼 있었고, 강사는 자기 분야를 깊이 알고 있었다. 1,000개가 넘는 직무를 8단계 수준으로 명세화한 한국의 국가직무능력표준(NCS), 그 안에 들어 있는 능력단위와 수행준거의 구조, 채용·훈련·평가가 어떻게 이 표준 위에서 정합성을 가지도록 설계되었는지 — 듣고 있으면 한국이라는 사회가 사람의 능력을 다루는 데 얼마나 많은 자본과 시간을 투자해 왔는지 새삼 느껴졌다.
그런데 강의실을 나오면서 마음 한쪽이 무거워졌다. 이 정교한 체계가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놓치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그 느낌의 정체를 며칠 곱씹은 끝에,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다다랐다. NCS는 한국이 인적 자원의 표준화를 위해 설계한 체계였지만, 실제로 만든 것은 다른 무엇이다. 한국 노동시장 전체의 자동화 청사진이다. 그리고 그 청사진을 가장 정교하게 그린 사람들이, 정작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장 보지 못하고 있다.
직무명세서를 LLM 명세로 읽는 일
수업의 과제로 NCS 직무명세서들을 들여다봤다. 어떤 직무가 어떤 수준에서 어떤 지식과 기술과 태도를 요구하는지, 어떤 행동 단위를 어떤 순서로 수행해야 하는지 — 위계적이고 정밀하게 적혀 있었다.
읽으면서 자꾸 머릿속에 같은 형식의 다른 문서가 겹쳐 보였다. 대형 언어 모델(LLM)에게 일을 시킬 때 사용하는 에이전트 스킬 명세. 어떤 도구를 언제 호출하고, 어떤 입력을 받아 어떤 단계로 처리하고, 어떤 출력을 어떤 조건에서 다음 단계로 넘기는지를 적은 그 문서. 형식이 같다. 위계의 깊이가 같다. 심지어 단위를 쪼개는 정신 — "이만큼 작아져야 평가 가능하다" — 까지 일치한다.
이건 우연이 아니다. NCS의 설계 철학("일을 객관적·표준적·평가가능한 단위로 분해한다")이, 그대로 LLM 에이전트의 설계 철학("일을 모듈·도구·평가가능한 출력으로 분해한다")과 만나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두 체계는 서로 다른 시대에 다른 의도로 만들어졌지만, 사람의 일을 어떻게 명세할 것인가에 대해 거의 같은 답에 도달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무서운 가능성이 보인다. NCS의 명세가 충분히 정밀하게 codify 되어 있다는 말은, 그 명세를 그대로 읽어 들여 자동화 시스템에 넣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부분 — 진짜 암묵지 — 만 발라내면, 나머지는 에이전트와 RAG와 워크플로우로 옮길 수 있다. 한국이 20년 동안 공들여 만든 표준이, 역설적으로 자동화의 입력 명세가 된다.
가장 자동화에 강했던 영역이 가장 빠르게 자동화된다
이 이야기는 추측이 아니다. 2026년 1월에 Anthropic이 공개한 노동시장 영향 연구는 직업별 AI 노출도를 측정했는데, 가장 노출이 큰 직업은 단순 사무가 아니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75%, 고객서비스 67%, 데이터 입력 67%. 직관과 어긋난다. "전문직"으로 분류돼 온 직업이 더 노출이 컸다. 같은 연구가 짚은 한 가지가 인상적이다 — 노출이 큰 직업의 노동자는 더 나이가 많고, 더 교육받았고, 더 고임금이다.
세계경제포럼의 〈Future of Jobs Report 2025〉도 같은 흐름을 보여준다. 2030년까지 9,200만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1억 7,000만 개가 새로 생겨 순 7,800만 개의 증가가 예상된다. 그러나 사라지는 일자리와 새로 생기는 일자리는 같은 사람의 것이 아니다. 사라지는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새로 생기는 자리로 자동으로 이동하지 않는다.
여기서 한국적 맥락 하나를 덧붙이자. 한국은 NCS를 통해 직무를 가장 잘 codify 한 나라 중 하나다. 그 codify 된 정도가 자동화 진입의 마찰을 낮춘다. 이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는 누가 어디에서 보느냐에 달려 있다. NCS 위에서 일자리를 잡으려고 준비해 온 청년에게는 좁아지는 문이고, NCS 위에서 자동화를 설계하려는 누군가에게는 거의 완성된 입력 데이터다.
정교한 체계일수록 변화에 늦는 이유 — 매몰비용과 기득권
한 사람이 평생 쌓아 올린 책과 인증과 자료가 그의 정체성을 떠받친다. 그러나 같은 자산이 새로운 흐름을 보지 못하게 만들기도 한다 — 매몰비용이 만드는 가장 정교한 저항선.
그러면 그 자리에 있는 분들은 왜 이 변화를 더 빨리 보지 못하는가. 답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이 어떤 종류의 인지 함정에 약한가에 있다.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가 오래전부터 다뤄 온 두 개념이 여기에 정확히 맞는다. 하나는 매몰비용 효과 — 이미 들인 시간과 돈 때문에 손해 보는 길을 계속 가는 경향. 다른 하나는 클레이튼 크리스텐슨의 〈혁신가의 딜레마〉 — 좋은 매니저들이 고객의 말을 잘 듣고 자기 분야에 잘 투자하는 그 행동 자체가, 새로운 흐름을 못 보게 한다는 것. 잘못된 일을 한 게 아니다. 잘했던 일이 정확히 이번에는 보지 못하는 이유가 된다.
HRD라는 분야는 한국에서 거의 한 세대를 들여 쌓아 올린 자본이다. 강사도, 인증제도도, 평가도구도, 정부 기금도, 대학 학위도 — 그 위에 서 있는 사람이 적지 않다. 이 위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평생 가꿔 온 분야의 핵심이 다음 5년 안에 자동화될지도 모릅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듣는 사람의 잘못 없이도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잘못이 아니라 매몰비용이 그렇게 만든다.
문제는 이게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회가 가장 정교하게 만든 자산을 가장 잘 다루는 사람들이 동시에 그 자산의 변혁을 가장 늦게 받아들일 때, 사회 전체의 변화 속도가 그들의 매몰비용에 묶인다. 이게 전문가의 기득권화가 일으키는 가장 큰 비용이다.
살아남는 전문가는 누구인가 — Polanyi의 답과 그 답의 갱신
50년 전 마이클 폴라니는 한 줄을 남겼다.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안다(We can know more than we can tell)." 명시적으로 적을 수 있는 지식 너머에, 적을 수 없는 암묵지가 있다는 의미였다. 그동안 자동화는 명시지의 영역에서 작동했고, 암묵지는 사람의 마지막 보루였다.
그런데 2025~2026년에 나온 일련의 연구가 이 보루에 균열을 내고 있다. arXiv 2507.03811 등의 연구는 LLM이 명시적 텍스트가 아니라 행동 흔적(behavioral traces) 자체에서 암묵지를 추론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다룬다. 같은 흐름의 또 다른 연구(arXiv 2507.16078)는 자동화와 AI가 세대 간 지식 전수 구조 자체를 바꾸고 있다고 본다. 암묵지가 자동화의 마지막 방어선이라고 가정하던 시대가 한 단계 옅어지는 중이다.
이게 의미하는 바는 단순하지 않다. 폴라니의 결론을 폐기하는 게 아니다. 다만 그 결론을 갱신해야 한다. 살아남는 전문가는 "암묵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자기 암묵지를 새 시스템과 통합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기 명시지는 도구에 넘기고, 자기 암묵지는 도구를 어떻게 쓸지 결정하는 메타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사람.
HRD에서 ARD로 — 다음 자본의 이름
여기서 한 가지 추측을 던져도 좋겠다. HRD가 한 세대 동안 한국 사회의 인적 자본을 다루는 분야였다면, 다음 한 세대 동안 같은 자리를 차지할 분야는 ARD — AI Resource Development쯤이 될 것이다. 사람이 아닌 에이전트와 모델과 시스템을 자원으로 보고, 어떻게 채용·훈련·평가·배치할지를 다루는 컨설팅. McKinsey가 이미 〈HR's transformative role in an agentic future〉라는 보고서로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Deloitte의 〈2026 Human Capital Trends〉도, WEF의 워크포스 리포트도, 모두 같은 그래프를 다른 각도에서 그리고 있다.
ARD가 자리 잡으면, 거기에 들어갈 표준과 직무명세서와 인증제도가 다시 만들어질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또 그 위에 한 세대의 자본이 쌓이고, 다시 매몰비용이 만들어지고, 또 다음 변혁이 그것을 위협할 것이다. 나도 이 흐름의 예외가 아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도, 만약 ARD라는 분야에 깊이 뿌리내린다면 5년 뒤 또 다음 변혁을 가장 늦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 인간은 그렇게 생긴 종이다.
결국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가슴에 달린 꼬리표지만, 정작 봐야 할 것은 그 사람이 가리키는 방향이다.
그래서 어제의 교실에서, 그리고 그 교실을 나오는 길 위에서, 나에게 남은 질문은 이거였다.
나는 누군가가 나에게 인사이트를 줄 때, 그것이 내 기득권과 부딪힐 때,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알아본다고 해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건 거창한 질문이 아니다. 어제 강의를 하신 분도 분명 자기보다 어린 누군가가 던지는 한마디 앞에서 같은 질문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는 쪽을 선택했을 것이다.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으면 그렇게 한다. 나도 5년 뒤에 똑같이 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답은 추상적으로 "열린 마음"이라는 말이 아니다. 답은 더 구체적이다. 꼬리표가 아니라 방향을 보는 훈련을 매주 하는 것. 사람들이 나에게 어떤 직함과 경력의 꼬리표를 붙여서 보더라도, 내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지 않는다고 답답해하지 않는 것. 답답해하는 대신,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 두 번째 뇌가 된 도구를 옆에 두고, "앞으로의 세상은 이렇게 옵니다"를 말이 아니라 결과로 보여주는 것.
이게 어제 그 교실에서 나에게 남은 가장 큰 자산이다. 정교한 체계 앞에서 잠시 위축되었던 그 시간이, 결국 가장 단단한 결심으로 바뀌는 자산. 강의를 해주신 분께 감사드린다. 그분의 자리가 가르쳐 준 것은 그분이 의도하신 것보다 훨씬 컸다.
참고 문헌:
- NCS 국가직무능력표준 — ncs.go.kr (8단계 수준체계, 능력단위·수행준거·지식·기술·태도)
- Anthropic — Labor Market Impacts of AI: A New Measure and Early Findings (2026)
- World Economic Forum — Future of Jobs Report 2025 (92M displaced, 170M created by 2030)
- Anthropic / arXiv 2506.06576 — Future of Work with AI Agents: Auditing Automation and Augmentation Potential across the U.S. Workforce
- arXiv 2507.03811 — Leveraging Large Language Models for Tacit Knowledge Discovery in Organizational Contexts
- arXiv 2507.16078 — Automation, AI, and the Intergenerational Transmission of Knowledge
- McKinsey — HR's Transformative Role in an Agentic Future (2026)
- Deloitte — 2026 Global Human Capital Trends
- Harvard Business Review — How Susceptible Are You to the Sunk Cost Fallacy? (2021)
- Clayton Christensen — The Innovator's Dilemma (HBR archive)
- Michael Polanyi — The Tacit Dimension (1966)
이 기사에 포함된 이미지는 AI 이미지 생성 모델(Gemini 3 Pro Image)로 제작되었으며, 영양군AI협회의 편집 감수를 거쳤습니다.
이 글은 명성심재의 심층 사고 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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